[연재12] 어떻게 하면 소셜이노베이터가 될 수 있나요?


2부 유엔에서 바라본 세계 

5) 공식적인 권한이 없어도 괜찮다




유엔에서 맡은 역할은 처음에는 홍보와 커뮤니케이션이었지만 점차 역량개발과 연구 파트까지 확장되었다. 유엔에 관심이 있는 후배들이 많다는 니즈를 발견하고 UN 청년홍보위원 제도를 도입해, 이들이 스스로 유엔과 관련된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하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이때 함께 했던 분들이 현재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에서 선임자연자본전문관(Senior Natural Capital Specialist)으로 있는 김주헌 씨와 유니세프한국위원회 부산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조원호 씨 등이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분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각자의 분야에서 함께 성장해간다는 것은 무척 멋진 일이다.


국제회의 관련 공부를 하진 않았지만, 다양한 형태의 국제회의를 기획하면서 이제는 여러 곳의 국제회의 기획에 컨설팅을 해줄 정도까지 되었다. 내가 있던 곳은 7명 정도의 작은 조직이었기에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었다. 한번은 '전자정부 관련 주제로 아시아태평양 유엔회원국 20개국의 장차관 등 고위직을 초청하는 200명 규모의 2박 3일 컨퍼런스'라는 아젠다가 정해졌고, 해당 컨퍼런스의 실무책임을 내가 맡게 되었다. 보통은 국제회의 운영 대행사(professional conference organizer)에게 장소선정, 초청장 제작과 발송, 교통편 제공, 통역 등 모든 행사운영을 맞기게 되는데, 당시에는 그런 대행사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유엔은 행사를 할 때 기본적으로 2가지의 기본문서를 만든다. 하나는 행사의 의도와 기획의도와 배경, 기대성과, 참석대상자 등을 담은 Aide Memoire라는 기본계획 문서이며, 해당 행사에 대한 전반적인 일정과 스케줄 등을 담은 Agenda라는 상세계획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일단 2가지 문서를 만든 다음 2명의 인턴과 함께 준비를 시작했고, 행사 며칠 전에는 10여명의 자원봉사자를 선발해 등록, 접수, 조명, 안내, 영접 등 다양한 역할을 맡겼다. 원래 큰 그림은 잘 그리는 편이지만, 구체성과 섬세함이 부족했던 내게 컨퍼런스 기획과 준비는 분명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참가하는 사람의 동선과 회의와 소규모 워크숍이 진행되는 공간을 상상하며 어떠한 서비스와 경험이 만들어질지 고민했던 이 때의 경험은 추후 디자인씽킹이라던지 서비스 디자인과 같은 연계된 고객과 경험을 중시하는 분야를 공부하고 활용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블로그 이름이 The UN Today.com이 된 이유 

유엔의 아시아태평양 공보책임자였던 라우 국장과 만났을 때였다. 그에게 각국에 존재하는 유엔정보센터(UN Information Center)가 한국에는 없어 적극적인 유엔 홍보와 커뮤니케이션 활동이 전개되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그때 그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렇다면 정태 네가 한국의 '사실상의'(de facto) 유엔 공보책임자 역할을 하면 되잖아?" 그가 말한 라틴어 '데 팍토'(de facto)는 '사실상 하지만 공식적이진 않은'(in practice but not officially established)이란 의미를 갖는다. 유엔정보센터가 없어 유엔의 캠페인이나 활동이 국내에 적극적으로 소개되지 않고 있다고 아쉬어하지 말고, 내가 스스로 '사실상'의 유엔정보센터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그렇게 해서 내 무명의 블로그는 '유엔온라인정보센터'(The UN Today.com)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때부터 유엔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활동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또한 뜻을 같이하는 이종현 대표(Earth Hour 한국대표) 및 하재웅 전문위원(메디피스) 등과 함께 유엔새천년개발목표 보고서 한국어판의 공식 번역과 발행, 유엔세계평화의날 한국조직위원회 설립과 세계평화의 날 기념행사 진행 등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런 활동들은 훗날 유엔총회의 모든 회원국에게 보고되는 '유엔 공보활동 연례보고서'에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고, 개인의 이름까지 이례적으로 유엔공식 문서 기록에 남겨지는 선물을 받기도 했다. 사실 '공식'이라는 부담감이 없기에 이러한 활동들이 가능했다. '공식'은 정해진 공식을 따라야하고 실수하지 않아야 된다는 부담감이 있지만, '비공식'은 부담감 없이 전례없는 시도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권위와 권한이 없어도 

라우 국장이 말한 '데 팍토'란 관점은 소셜이노베이터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태도이다. 소셜이노베이터에게 그 누구도 공식적인 권위와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셜이노베이터는 자신이 '사실상의 학교장' 또는 '사실상의 경찰서장'과 같은 열정으로 자신의 권한 밖인 학교폭력이나 범죄예방과 같은 사회문제의 해결에 뛰어든다. '왜 무엇이 안되고 있는가?'라는 푸념에 그치지 않고,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권위와 권한이 없어도 전혀 행동에 지장을 받지 않는다. 그들의 정당하고 올바른 행동이 오히려 그들에겐 권위이자 권한으로 활용된다.


'화살표 청년'으로 유명한 이민호 씨는 '데 팍토' 소셜이노베이터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한 강연회에 함께 연사로 참여했다가 알게 된 이민호 씨는 알고 보니 내가 매일 애용하는 대중교통 버스노선도에 붙여있는 '빨간색 화살표 방향 스티커'를 만든 장본인이었다. 버스 노선도에 방향이 표기되어 있지 않아 여러차례 버스를 잘못 탄 이민호 씨는 고민 끝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는 사비 20만원을 털어 눈과 비를 맞아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특스코팅 화살표 스티커를 제작했고, 학교 수업이 없을 때마다 자전거를 타고서 서울 전역의 버스 정류장을 찾아갔다. 그가 정성스럽게 붙여놓은 '빨간 화살표'는 지금도 매일 서울에만 500만명이 넘는 버스 이용객에게 말할 수 없는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테 팍토'면 충분하다 

이민호 씨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박원순 서울시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어찌보면 공무원들이 해야할 일인데, 자발적으로 하시는 분이 있네요. 표창감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이민호 씨가 대학생으로서 처음 불편을 겪었을 때 '이건 서울시 공무원이나 교통관련 전문가들이 해결할 문제야'라고  생각했다면 '빨간 화살표'는 결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도 그에게 '대중교통 관련 권위와 권한'을 제공하진 않았지만, 그가 행동을 취하는 데에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혹시 '내겐 권한이 없어'라고 푸념하고 있는가? 조직의 갈등, 커뮤니티의 분쟁, 방치되고 있는 공유지의 비극 앞에서 당신에게 공식적인 권위와 권한이 없다면, '데 팍토' 카드를 쓸 절호의 기회이다. 어떠한 권위나 권한의 부여 여부와 상관없이 소셜이노베이터는 '데 팍토'를 의지하여, 실패와 실수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행동에 나설 수 있다. 오늘 당신이 활용한 '데 팍토'는 무엇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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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셜앙터프러너 단호비전 Trackback 0 : Comment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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